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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6 [펌] 음악용어1
  2. 2011.02.25 [펌] 곡 제목에 붙은 알파벳은 무슨 뜻?
musique/classique2011. 2. 26. 15:33

“따다다 단!”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응축한 듯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Op.67의 첫 소절. 베토벤은 이에 대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제자인 쉰틀러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운명이니 뭐니 알 바 아니다. 이것은 알레그로 콘 브리오일 뿐이다.”라고 이 “따다다 단!”에 대해서 말했다. 작곡가가 쓴 악보 이상의 해석도 이하의 해석도 없을 뿐, 그것을 오롯이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래. 고집쟁이 할아버지 토스카니니가 옳다 치자. 괜히 거슬러서 좋을 것 없어 보이는 근엄하신 표정이다. 기꺼이 양보하듯 알레그로 콘 브리오라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알레그로 콘 브리오가 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마르게리타 피자처럼, 봉골레 스파게티처럼 입가에 맴도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탈리아어다. 클래식 음악에는, 그 작곡가가 독일 사람이든 프랑스 사람이든 영국 사람이든 이탈리아어가 깊게 스며들어 있다. 왜 그럴까.

 

 

 

클래식 음악에 이탈리아어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한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기 때문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서양 클래식 음악이 발달하는 역사적인 선상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이후까지도 음악의 중심지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프랑스 작곡가들의 등용문이었던 ‘로마 대상’은 원래 미술과 건축 부문만 상을 주다가 19세기 음악 부문이 생겼는데, 로마에 유학해서 이탈리아의 바람을 쐬며 공부할 수 있는 것이 대단한 특전으로 여겨졌다. 베를리오즈, 구노, 비제, 드뷔시 등이 혜택을 입었다.

 

또 클래식 음악에서 이탈리아가 쥔 헤게모니는 종교적인 데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서양음악은 기독교와 함께해 왔다. 비록 종교가 없다 하더라도 작곡가들의 아우라가 배어 있는 숭고한 종교음악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교황청이 있는 로마, 즉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가장 문화적이고 음악적인 곳이라는 유리한 입지를 가졌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수적인 우세도 한 요인이다. 이탈리아는 자국 출신의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했고, 많은 작곡가들이 이탈리아어를 사용했으므로 악보상에도 이탈리아어 용어가 많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탈리아는 최초의 오페라 발상지이기도 하다. 클래식 음악에서 예전부터 오페라나 가곡의 가사로 이탈리아어로 씌어졌고 오라토리오를 비롯한 종교음악들의 가사도 전부 라틴어 혹은 이탈리아어로 썼다가, 종교개혁 이후 서서히 코랄과 같은 자국어로 된 음악형식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화가 로렌초 코스타가 그린 [콘서트], 1485-1495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서양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렇다면 고전파와 낭만파를 수놓은 수많은 독일의 작곡가들은 ‘허당’이었나? 물론 아니다. 독일어를 쓰는 작곡가들의 수가 늘면서 독일어로 된 용어도 다수 생겨나게 된다. 요컨대 음악용어란 단지 작곡가가 어떤 언어를 쓰는가, 그리고 그 시대에 어떤 언어를 쓰면 많은 사람들이 작곡가의 의도를 알아볼 수 있었는가의 문제로 이탈리아어가 많을 뿐이다. 프랑스가 혁명 국가였고 전세계에 그 힘을 떨쳤기에 정치, 경제, 외교 용어로 프랑스어를 많이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이탈리아 음식 덕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메뉴판에서 생소한 이탈리아어를 읽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 향하는 길모퉁이에는 늘 교통 표지판처럼 이탈리아어가 눈에 띄게 마련이다.

 

 

 

피자, 파스타 메뉴판을 읽듯이 음악용어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다시 이야기를 “알레그로 콘 브리오일 뿐이다!”로 돌리자. 토스카니니가 아무리 뭐라 해도 나는 [교향곡 5번]에 붙은 ‘운명’이라는 이 표제 아닌 표제가 참 좋다. 뭔가에 얻어맞은 듯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해이해지고 될 대로 되라던 풀어진 나사같던 마음을 닦고 조인다. 거기에 기름을 치고 긴장감을 다시 북돋우는 훌륭한 음악이다.

 

베토벤 [교향곡 5번]에는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아간다는 직선적이고 발전적인 서구의 세계관이 단순하지 않게, 함축적으로 제시돼 있다. 영화 ‘영어 완전정복’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베토벤 [교향곡 5번] Op.67(‘작품 육십 칠’로 읽는다)의 ‘이탈리아어 완전정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맛보기라도 어디인가)’에 첫 걸음을 떼어보자.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
알레그로(Allegro)는 ‘빠르고 경쾌하게’라는 뜻이고 콘 브리오(con brio)는 ‘기운차고 활발하게’라는 뜻이다. 결국 ‘운명’ 1악장은 빠르고 경쾌하고 기운차고 활발하게 연주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2악장 안단테 콘 모토(Andante con moto)
안단테(Andante)는 느리게 연주하라는 말이다. 모데라토와 아다지오의 중간 속도로, 걷는 정도의 속도라고 할 수 있다. 콘 모토(con moto)는 ‘생생하게’ 또는 ‘움직임을 가지고 약간 빠르게’ 연주하라는 말이다. 결국 안단테 콘 모토는 안단테보다는 조금 빠르게, 활기있게 연주하라는 지시어다.

 

3악장 알레그로(Allegro), 4악장 알레그로
앞서 1악장에서 설명이 됐다. 빠르고 경쾌하게.


이탈리아 음식 메뉴판 읽듯이 클래식음악 용어도 친근하게 느껴보자

 

자, 이제는 베토벤에 이후에 위대한 교향곡을 쓴 작곡가들의 작품을 살펴보자. 다음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9번 그레이트] D(도이치 번호)944의 악장들이다.

 

1악장 안단테 ;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Andante ; Allegro ma non troppo)
안단테는 이미 언급했듯 ‘느리게’, 그리고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는 ‘빠르지만 지나치게 빨라선 안 된다’는 뜻이다.

 

2악장 안단테 콘 모토(Andante con moto)
‘운명’ 2악장과 같은 뜻이다.

 

3악장 스케르초 : 알레그로 비바체(Scherzo : Allegro vivace)
스케르초(Scherzo)는 ‘익살스럽고 해학적이고 분방한’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알레그로 비바체(Allegro vivace)는 ‘빠르고 생기있게’  연주하란 뜻이다.

 

4악장 피날레 : 알레그로 비바체(Finale : Allegro vivace)
피날레(Finale)는 음악에서 한 악장의 마지막에 붙는 ‘종곡’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작곡가는 역시 베토벤의 후계자로 불린 요하네스 브람스이다.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브람스 [교향곡 1번]에 대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잇는,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브람스의 음악은 북독일 출신답게 우리나라 늦가을과 초겨울의 정취와 잘 어울린다. 다음은 브람스 [교향곡 1번] Op.68의 악장들이다.

 

1악장 운 포코 소스테누토 알레그로(Un poco sostenuto Allegro)
운 포코(Un poco)는 악보에서 ‘작게 연주하라’ 는 뜻이다. 소스테누토는 영어의 sustain(유지하다)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충분히 끌면서 음을 그대로 지니고 연주’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빠르고 경쾌한 알레그로로 이어진다.

 

2악장 안단테 소스테누토(Andante sostenuto)
느리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는 2악장이다.

 

3악장 운 포코 알레그레토 에 그라치오소(Un poco Allegretto e grazioso)
긴 이탈리아어 조합이 나왔다. 그러나 거의 다 위에 언급한 내용이다. 작게 연주하는 운 포코 다음의 알레그레토(Allegretto)는 ‘조금 빠르게’ 연주하란 말이다. 즉 알레그로보다는 조금 느린 정도다(그럼 안단티노는 뭘까? 조금 느리게다. 안단테보다 조금 빠르게 연주하란 말이다. 하나를 배우면 둘을 안다!). 에(e)는 그리고(영어의 and)이고 그라치오소(grazioso)는 ‘우아하고 장엄하게’ 연주하란 뜻이다. 곡의 악장을 떠나 그라치오소는 참 멋진 말이다.

 

4악장 아다지오-피우 안단테-알레그로 논 트로포, 마 콘 브리오(Adagio-Piu Andante-Allegro non troppo, ma con brio)

아다지오는 느리게 연주하는데, 그 느림의 정도는 안단테와 라르고(아주 느리게) 사이에 위치한다. 피우(piu)는 ‘더’ ‘더욱’의 뜻이다. 따라서 피우 안단테는 ‘안단테보다 좀 더 느리게’, 알레그로 논 트로포는 ‘지나치지 않으면서 빠르게’ 연주하는 것이며, 마 콘 브리오는 ‘그러나 기운차고 활발하게’ 연주하란 뜻이다.

 

 

 

클래식음악을 감상하다 보면 음악용어도 메뉴판처럼 익숙해진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데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용어다. 영어에는 익숙하더라도 이탈리아어는 상대적으로 생소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클래식음악을 감상할수록 이탈리아어 용어들은 피자의 메뉴처럼 익숙해질 것이다. 베토벤과 슈베르트, 브람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고전 낭만 작곡가들의 기둥처럼 우뚝 서있는 교향곡들에서 우리는 뿌리 깊은 클래식 음악의 오래 통용된 화폐같은 이탈리아어를 발견한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 특히 이탈리아 벨 칸토나 베리즈모 오페라 애호가들은 이탈리아 축구에 남달리 열광하기도 한다. 2002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도 비에리의 첫 골에 환호를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이건 거짓말이지만 다른 나라와 일전을 펼칠 때는 이탈리아를 응원했다). 계절이 바뀌려 한다. 위에 언급한 그라치오소(Grazioso)같이 우아하고 장엄하고 품위 있게 가을을 정리하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 이번 시간에는 클래식 음악 용어라는 바다에 잠깐 손을 담가 보았다. 짠 맛이 뇌리에 남는다. 클래식 음악용어 여행은 다음 편으로 이어진다.


Posted by 앤드리아
musique/classique2011. 2. 25. 12:29

글꼴과 색깔 다른 작곡가의 명함읽기


R군(22세)은 대형 음반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군대 가기 전까지 대학을 휴학하고 뭐 할까 고민하다가 워낙 음악을 좋아해서 선택한 일이 바로 음반 큐레이터 일이다. 온갖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메틀과 포크를 두루 섭렵한 R군의 음반 추천 안목이 워낙 좋아 벌써 단골 손님들도 하나 둘 생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요즘 R군은 매장안에서 따로 나뉘어 있는 클래식 음반 코너를 기웃거리고 있다. 클래식 음악 담당 큐레이터는 네 살 연상의 H양. H양은 본인이 음악을 좋아하는 데다가 아버지가 소문난 음악 애호가다. 어려서부터 좋은 클래식 음반을 두루 들어온 ‘젊은 고수’로 통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R군은 H양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가끔씩 크게 웃을 때 짓는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꿈에도 여러 번 나왔다. 처음에는 말도 못 붙이던 R군은 한 달이 지난 요즘은 음악을 핑계로 H양에게 자주 말을 건다. H양은 친절하고 박식했다. 쉬운 말로 설명해주는 H양 덕분에 클래식 음악도 듣기 시작했다. 손님이 없어 한가한 오후, R군이 또 말을 건넨다.

 

 

 

작품번호 Op.와 No.

“누나, 쇼팽의 ‘겨울바람’이라는 게 어떤 곡이에요? 그 음반 좀 찾아주세요.”
“그 곡은 쇼팽이 작곡한 [에튀드] 중에 있어. 에튀드는 ‘연습곡’이란 뜻인데, 어디 보자. 요새 인기있는 머레이 페라이어가 연주한 에튀드 음반이야.”

 

“이 중에서 어떤 곡이 ‘겨울바람’이죠?”
“작품 25 중에 11번이야.”
“이 음반엔 작품이란 말도 없고 몇 번이란 말도 안 써있는 것 같아요.”

“Op. 25  No.11이 그 곡이지. Op. 25는 오푸스 25 또는 작품 25라고 읽으면 되고, No.11은 11번이라 읽으면 된단다.”

“클래식 음반에 Op.와 No.가 하도 많이 써 있어서 무슨 뜻인가 했더니 그런 의미였군요.”

“쇼팽은 연습곡을 두 번 출판했어 한 번은 Op.10으로, 두 번째는 Op.25로 출판했지. 그것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단다.”
“그렇군요. Op.는 작품을 뜻하고 No.는 번호를 뜻하는군요. 알파벳 기호가 복잡하네요. 이번엔 바흐 음반도 한 장만 추천해주세요.”
“아, 그래? 잠깐만 기다려봐. 바흐 작품 중에 제일 재밌게 들을 수 있을만한게 뭐가 있을까.”


쇼팽의 에튀드 음반에 OPUS 10, OPUS 25(붉은색 사각형 부분)이라고
적여있다. 작품번호를 뜻한다.

 
 
 

바흐 작품번호 BWV와 헨델 작품번호 HWV

한참 음반을 고르던 H양은 한 장의 음반을 건넨다.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이다. R군은 음반 재킷을 살펴보다가 묻는다.


“그런데 여기에 BMW 988이라고 적힌 것은 무슨 뜻인가요? 글렌 굴드란 피아니스트가 독일차를 탔나요?”
“아, 그거? 호호호. 그 알파벳은 BMW가 아니고 BWV야” H양은 웃으며 대답했다.
“BWV? BWV라는게 뭔가요?”
“바흐 작품번호를 말하는 거야. 볼프강 슈미더라는 독일의 음악학자가 정리한 바흐 작품목록의 약자인 BWV를 쓴 거란다. 바흐 베르케 페어차이히니스(Bach Werke Verzeichnis)라고 하지. 모두 1120개나 있단다.”
“아하, 그렇구나. 1000개가 넘다니 엄청나네요.” 

 

문득 생각난 듯이 R군이 말했다. R군은 바흐의 B가 BWV면 헨델의 H도 같은 경우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럼 HWV는 헨델 작품번호인가요?”
“어떻게 알았어? 맞아. 헨델 베르케 페어차이히니스(Handel Werke Verzeichnis)의 약자고 헨델의 작품번호를 말하지.”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음반엔
BWV 988(붉은색 사각형 부분)이라고 적혀있다.

 

 

 

모차르트 작품번호 K와 슈베르트의 D

“그럼 모차르트 작품번호는 MWV겠죠?”  

“아니, 그건 아니야. 모차르트 작품번호는 쾨헬이야.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이자 광물학자였던 모차르트 연구가 루드비히 폰 쾨헬의 이니셜을 딴 것이지. 쾨헬은 총 626곡의 모차르트 작품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번호를 붙였지. K는 종종 ‘쾨헬 작품목록’이라는 의미의 이니셜을 따서 KV로 표기되기도 한단다.” 

 

R군은 쾨헬이라는 단어가 어딘가 익숙하게 들렸다. 어디에서 들었던 말 같았다. 곰곰히 생각하던 R군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쾨헬? 그거 옛날에 우리집에 있던 오디오 이름이었어요. 그게 모차르트 연구가의 이름이었군요?”
“그래. 유명 작곡가의 작품번호는 대개 그 작곡가를 연구하고 작품을 분류하는 데 애쓴 음악학자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지. 여기 이 CD를 봐.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인데 D 911이라 붙어 있지? 슈베르트의 작품번호는 D로 표기하고 도이치 번호라고 읽어. 슈베르트의 권위자 오토 에리히 도이치의 이름을 딴 것이지. 도이치는 총 998개의 슈베르트 작품에 연대기순으로 작품번호를 매겼어. 잠깐 이리 와봐. 다른 것도 보여줄게.”

 

 

하이든의 작품번호 Hob

H양은 음반 진열대로 걸음을 옮겨 H로 시작하는 음반 진열장 앞에서 멈췄다. 올해는 하이든 서거 200주년이라 하이든 관련 음반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R군이 받아든 음반은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고별' 음반이었다. 그 음반엔 Hob.1/45라고 씌어 있었다.

 

“하이든 작품번호는 뭘까?” 

“홉? 호브?  에이치오비? 이건 어떻게 읽는 거예요?”
“호보켄이라고 읽어. 하이든의 작품에는 통상적으로 호보켄이라는 번호가 붙어. 네덜란드의 안토니 판 호보켄(Anthony van Hoboken)이라는 사람이 1857년과 1871년에 하이든의 음악을 정리했지. 호보켄은 유명 작곡가들의 자필악보를 사진으로 촬영해 방대한 양의 자료실을 만들어 운영했는데, 특별히 말년에는 하이든의 작품 목록을 정리한 것으로 유명해.”

 

R군은 하이든의 다른 음반들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숫자와 기호 사이에 슬래쉬 기호나, 로마숫자 표기 등이 적혀있었다. 다른 작곡가의 번호 표기 형식과는 어딘가 달라보였고, 더 복잡해 보였다.

 

“이 번호는 좀 다르네요 1/45라고 붙어있는데.”
“호보켄 번호는 음악의 각 장르에 대해서도 분류가 되어 있지. 하이든의 교향곡 45번은 Hob.1/45 혹은 Hob1.45라고 써. 앞에 붙는 번호는 서곡은 la, 현악 4중주는 III, 협주곡은 VII 등 다양하지. 기호를 붙여서 장르를 식별하는 것이란다.”
“아하…… 그렇구나. 호보켄!”


하이든의 호보켄 번호 Hob와 슈베르트의 도이치 번호 D(붉은색 사각형 부분)
가 보이는 피아니스트 키신의 음반 자켓

 

 

 

리스트의 작품번호 S

H양이 손님의 음반 계산을 돕는 사이 R군은 CD 진열장을 훑어봤다. 러시아의 명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음반을 집어들었다. R군은 음반 표지에 적힌 영어와 알파벳 약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Liszt piano concerto No.1이라고 쓰인 것은 이 음반이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담고 있다는 뜻이고, 그 옆에 S.124라고 적혀 있네요. 이게 리스트 작품번호인가요?” 음반 계산을 끝내고 H양이 돌아오며 말했다. 

“이제 응용력이 생겨서 잘 아는구나. 리스트 작품번호를 의미하는 S는 ‘설’이라고 읽어. 험프리 설(Humphrey Searle)이라는 음악학자가 리스트의 곡에 작품번호를 붙였기 때문에 설(Searle)이란 이름의 첫 글자를 딴 거지. 자세히 말하면 1966년 ‘리스트의 음악(The Music of Liszt)’라는 목록에 기초한거야. 거기에 샤론 윙클호퍼와 레슬리 하워드라는 사람이 좀 더 연구를 덧붙여서 완성이 됐지. 험프리 설은 1915년에 태어난 영국의 작곡가인데 베베른의 제자이기도 했어. 피아니스트 리히터를 좋아하니?”
“아직 연주는 많이 못 들어봤지만 피아니스트 중에는 리히터, 호로비츠, 아르헤리치는 연주 스타일이 독특해서 마음에 남는 것 같아요.”
“호로비츠 좋아하면 이 음반도 들어봤겠구나. 이번엔 이 음반을 한번 살펴볼까?”

 

클래식 음악의 제목에 수많은 알파벳이 붙는다. 각 알파벳은 작품번호를 뜻하며 각기 고유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알면 작품 식별이 훨씬 쉬워진다.

 

 

스카를라티의 작품번호 K와 L


H양이 진열대 앞에 꺼내놓은 음반은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스카를라티 소나타 음반이었다.

 

“가만있자. 여기 보면 스카를라티 소나타에 K.380이라고도 되어 있고 L.23이라고도 나와 있네요. 쾨헬 번호가 여기 왜 또 나오죠?”
“거기서 K는 쾨헬이 아니라 커크패트릭이라고 읽는 거야. 미국의 하프시코드 연주자 랄프 커크패트릭이 1953년에 600여곡이 넘는 스카를라티의 건반 악기 소나타를 정리하였는데 그 이름을 따 K를 붙이는 거지. 커크패트릭은 스카를라티 말고도 바흐 등 바로크 음악 해석을 참 잘한 명연주자이기도 해.”
“아, 커크패트릭이라고 읽는 거구나. 그럼 여기 L은 뭔가요?”
“L도 역시 스카를라티 작품 번호야. ‘롱고’라고 읽지. 알레산드로 롱고는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야. 1944년 나폴리 음악원의 원장을 지낸 사람인데 1892년 나폴리에 스카를라티 협회를 설립하고, 스카를라티의 작품 목록을 만들었거든. 스카를라티의 건반 소나타는 오랫동안 롱고 번호로 분류가 됐었지만 나중에 커크패트릭이 더욱 방대하고 꼼꼼하게 분류해서 요즘은 커크패트릭을 더 많이 쓴다더군. 내 얘기 듣고 있니?”

 

R군은 H양의 설명을 뒤로 하고 비발디의 음반을 찾고 있었다. 문득 영화 [샤인]에 나왔던 청아한 목소리의 노래가 문득 떠올랐다. 음반을 뒤적이던 R군이 CD 한장을 집어들고 말했다.

 

“아 네. 이 음반인 것 같아요. 지난 번에 매장에서 틀었던 비발디 곡들이 아주 좋아서요. 그 영화 [샤인]에 나온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던가? 그 곡이 좋더라고요.”

 

 

 

비발디의 작품번호 RV

“비발디의 칸타타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Nulla in mundo pax sincera)를 말하는 거구나?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의 목소리가 참 깨끗하고 천상의 목소리같이 느껴지는 곡이지. 누나도 아주 좋아하는 곡이야. 이제 비발디 작품번호를 공부해 볼까?”
“RV.라고 적혀 있네요. 마치 자동차 용어 같아요. RV, SUV? 이건 뭐라고 읽나요?”
“그건 리용 번호라고 읽어. 안토니오 비발디의 작품 목록에 덴마크의 음악학자 피터 리용(Peter Ryom)이란 사람이 목록을 붙여 만든 것이지. Rv는 리용 번호(Ryom Verzeichnis)의 이니셜을 딴 것이고.”
“아하, 리용 번호. 여기 비발디의 [현과 콘티누오를 위한 콘체르토 C단조]에는 Rv.120이라고 붙어 있네요.”
“그런데 비발디 작품번호는 리용 번호 말고도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 것이 특징이야. 음악 사전을 보면 비발디의 모든 작품이 리용 번호로 표기되어 있지 않지. 비발디의 작품을 분류하는 데는 리용 번호 외에 Op, P.(팡시에르 번호) 등 여러가지 기호가 사용되는 경우도 많거든. 비발디의 명곡 [사계]는 잘 알지?”
“네,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좋아해요. 겨울은 대중음악에 사용되기도 했죠?”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는 사실 [화성과 창의의 시도] 라는 작품 중에서 3악장씩 첫 네 작품에 표제를 붙인 곡이거든. 조슈아 벨이 연주한 [사계] 음반의 뒷면을 보면 이렇게 나와있지. 어디 한번 차근차근 읽어볼까?”

 

비발디 [사계]음반의 뒷면 각 곡마다 비발디의 작품번호를 뜻하는 RV 번호(붉은색 사각형 부분)가 붙어있다.

 

 

“먼저 Concerto No. 1 in E major, Op. 8이라고 적힌 것은 비발디의 협주곡 작품 8 중의 1번 E장조의 곡이라는 것이고, 뒤에 붙은 RV 269가 리용 번호지. 리용 번호 269는 ‘봄’, 리용 번호 315는 ‘여름’, 리용 번호 293은 ‘가을’, 리용 번호 297은 ‘겨울’(붉은색 사각형 부분)로 읽으면 된단다. 비발디 곡은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인 [프로메테우스] P.308 처럼 리용번호가 아닌 팡시에르 번호인 P가 붙기도 하지.”
“와, 누나는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기 유명한 단골 손님 오셨네요. 저분하고 음악 이야기 하면 보통 30분인데.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보케리니 [첼로 협주곡]에 붙은 G는 뭐라고 읽어요?
“아, 그건 제라르 번호야. 보케리니 작품을 정리한 프랑스 음악학자 이브 제라르의 이니셜이지.”

 

R군은 H양과 오래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녀의 설명에 오늘 클래식 음악에 한걸음 더 다가선 것 같았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작품번호는 저마다의 색깔과 글꼴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작곡가들의 명함같이 느껴졌다.

Posted by 앤드리아